은혜의 기름 – 성령

하나님의 성령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만을 아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성령의 감화가 없는 진리의 이론만으로는 사람의 심령을 깨우치고 마음을 심화시킬 수 없다. 우리가 비록 성경의 말씀과 약속들에 정통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이 진리를 깊이 깨닫게 하지 않을 것 같으면 우리의 품성은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 성령이 우리 마음을 밝혀 주지 않을 것 같으면 사람들은 진리와 오류를 분간할 수 없게 될 것이며,  저희는 사단의 교묘한 시험에 빠지게 될 것이다.

미련한 처녀로 대표된 계급은 외식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진리를 존중히 여기고, 진리를 옹호해 왔으며, 또 진리를 믿는 사람들에게 매혹되었다. 그러나 저희는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지 않았다. 그들은 반석되시는 예수님 위에 떨어져 저희의 옛 성질을 깨뜨리려 하지 않았다. 이 계급은 또한 돌밭에 떨어진 씨로 묘사된 청중을 대표한다. 그들은 주저하지 아니하고 말씀은 받았으나 그 말씀의 원칙을 실천하지 않았다. 그 말씀의 감화력은 순간적이었다. 성령이 사람의 마음속에 역사하게 되고 이 역사를 당사자가 갈망하고 동의하게 될 때 그의 안에는 새로운 품성이 심어지게 된다. 그러나 미련한 처녀로 대표된 계급은 단지 피상적이고 표면적인 행위만으로 만족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품성을 연구하지도 않고 하나님과 교제하지도 아니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할 줄도 모르고 하나님을 쳐다보고 살 줄도 모른다. 하나님께 대한 저희의 봉사는 점차 저하되어 형식화 되고 만다.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치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을 좇음이라” (겔 33:31). 사도 바울은 이런 상태가 예수 재림 직전에 사는 사람들의 특성이 될 것이라고 밝히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이런 사람들은 위태로운 때에 평안하고 안전하다고 부르짖는 자들이다. 저희는 저희 마음을 안심시키고, 위험을 꿈에도 생각지 않는다. 저희가 저희의 혼수 상태에서 깨어났을 때에 그들의 부족을 깨닫고 다른 사람에게 가서 저희의 부족을 채워 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영적 사물에 있어서는 아무도 다른 사람의 부족을 보충해 줄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각 사람에게 값없이 제공된다.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계 22:17)는 복음의 기별이 전파되었다. 그러나 품성은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없는 것이다. 아무도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믿을 수 없고 아무도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성령을 받을 수 없다. 아무 사람도 성령의 역사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품성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없다.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 있을 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은 자녀도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겔 14:20).

품성은 위기의 때에 나타난다.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는 간장한 소리가 들리고 졸던 처녀들이 잠을 깨었을 때에 누가 준비되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기다리는 처녀들은 나와 맞으라는 소리를 갑자기 듣게 되었다. 그 중에 어떤 이들이 이 불의의 사태를 위해 준비하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준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와같이 지금도 뜻밖의 재난이나 죽음에 직면하게 될 어떤 사태가 생길 때에 과연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참으로 믿고 있었는지의 여부가 판명될 것이며 또 그의 마음이 은혜로 말미암아 보존되어 있는지를 드러낼 것이다. 은혜의 시기가 끝나고 최후의 큰 시련이 임하게 될 것인데 그 때 가서 심령의 부족을 채우기에는 너무 늦게 될 것이다.

열 처녀는 이 세상 역사의 저녁에 신랑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모두 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한다. 모두 다 초청을 받고 기름과 등을 가지고 있으며 모두 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 모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중 다섯은 준비되지 않았다. 그 다섯은 놀라고 당황하면서 연회장 밖에 있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갈 권리를 주장하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눅 13:26).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마 7:22). 여기에 대하여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써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 나를 떠나 가라”(눅 13:27)고 대답하신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친밀히 사귀지 못했으므로 하늘나라의 방언을 알지 못하며 하늘의 기쁨도 알지 못한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1).”(실물, 408-413)

“일찍이 인간의 귀에 들린 모든 말 가운데 가장 슬픈 말은 곧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는 운명의 선고일 것이다. 그대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성령과의 교제가 혼인 잔치 때에 그대로 하여금 기뻐하는 무리에 참가할 수 있게 해 줄 유일한 것이다. 성령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는 그대가 그 자리에 참여할 수 없다. 그 빛이 소경의 눈에 보이게 될 것이며, 그 아름다운 음악이 귀머거리의 귀에는 들리게 될 것이지만 그 곳의 사랑과 기쁨은 세속으로 마비된 마음에 아무런 즐거움도 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 그대 자신이 천국에 들어가 어울려 살기에는 부적합하기 때문에 그대는 천국에서 제외될 것이다.

우리는 “보라 신랑이로다”라는 소리를 듣고 비로소 깨어나 텅빈 기름병을 잡고 기름을 넣으려고 하는 그런 방법으로는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할 수 없다. 우리가 이 지상에 살 동안 그리스도를 멀리 떠난 생애를 살았다면 하늘에 가서도 그분과 교제하며 살기에는 합당치 못할 것이다.

이 비유를 보면 슬기 있는 처녀들은 등을 가졌을 뿐 아니라 그릇에 기름을 담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등불은 기다리던 그 밤 동안 조금도 흐려지지 않고 환하게 불타 오르고 있었다. 그 등불은 신랑을 축하하기 위하여 비추는 불빛을 더욱 환하게 해 주었다. 어두움 속에서 비치는 이 등불은 신랑이 혼인 잔치를 위하여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을 환하게 비추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도 성령을 통하여 어두운 이 세상에 빛을 비춰 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빛이시며 그것을 받는 자의 생애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된다. 성령은 그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을 심어 주심으로써 사람들 속에 하나님의 속성을 계발시켜 준다. 그분의 영광의 빛인 그분의 품성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서 비춰나와야 한다. 그리하여 저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집으로 가는 신랑의 길을 비춰주며, 하늘 도성으로 가는 길과 어린 양의 혼인 잔치로 가는 길을 밝혀주게 된다.

신랑이 온 때는 가장 캄캄한 때, 즉 밤중이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의 재림도 이 지상 역사의 가장 캄캄한 시대에 있을 것이다. 노아와 롯 시대의 형편은 인자가 오시기 직전의 세상 형편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이 시대를 예언하는 성경절들은 사단이 모든 힘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살후 2:9, 10) 활동할 것을 말하고 있다. 그의 활동은 마지막 날에 급속도로 증가하는 어둠과 오류와 이단과 미혹으로 명백해지고 있다. 사단은 단지 세상을 사로잡을 뿐만 아니라 그의 속임수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자처하는 교회들을 암암리에 부패시키고 있다. 큰 배도는 점점 격화되어 광선이 통과할 수 없는 총담같이 캄캄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때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진리를 위한 시련의 밤이 될 것이며, 슬픔의 밤과 핍박의 밤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어두운 밤으로부터 하나님의 빛이 비치게 될 것이다.

그는 “어두운 데서 빛이 비치”(고후 4:3)게 하신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창 1:2) 을 때에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창 1:3)었다. 이와같이 영적으로 어두운 밤에 하나님의 말씀은 “빛이 있으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 60:1)고 하신다.

성경은 또 이렇게 말한다.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사 60:2)라.

이 세상을 덮고 있는 어두움은 하나님께 대한 오해의 어두움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지식을 잃어버리고 있다. 하나님의 품성은 잘못 이해되고 그릇 해석되고 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기별이 전해져야 한다. 이 기별은 광범위한 감화력과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품성이 널리 알려지게 해야 한다. 이 어두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 곧 그분의 인자와, 긍휼과, 진리의 빛을 비춰 주어야 한다.

이 사업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다음의 말씀 중에 간단하게 요약되어 있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릴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사 40:9, 10).”(실물, 413-415)

“그리스도교는 죄를 사하는 이상의 의미가 있다. 우리의 죄를 제거한 다음에 그 빈자리를 성령의 은혜로 채운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또 신령한 빛으로 마음을 밝히고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빈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심으로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심령을 다스릴 때에 그것은 순결하게 되고 죄에서 해방된다. 그리하여 복음의 계획의 영광과 충만함과 완전함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완성된다. 사람이 구주를 받아들이게 될 때, 완전한 평화와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확신의 빛을 반영하게 된다. 우리의 생활 속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품성의 아름다움과 향기로 하나님께서 진실로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구주로써 보내셨다는 것을 증거하게 된다.”(실물, 419-420)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