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에 합당한 열매

“하나님께서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요구하신다. 그런 열매가 없으면 우리의 신앙 고백은 아무 가치가 없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이름을 결코 부른 적이 없는 자들 사이에서도 진실한 신자들을 일으키실 수 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9).

하나님은 마음과 생애가 변화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의존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죄를 범하고 있는 어떤 사람에게도 호의를 보이지 않으실 것이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마 3:10).

의의 사업을 등한히 하면서 목사를 칭찬하고 추켜 세우는 자들은, 그들이 목사에게 돌아온 것이지 하나님께 돌아온 것이 아니라는 분명한 증거를 보여 준다. 우리는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고 묻는 바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기별을 통하여 그대들이 들은 것은 성령의 음성이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사람의 소리였는가? 맺힌 열매가 나무의 성격을 증거할 것이다.

외형적 형식이 우리를 정결케 할 수 없다. 가장 성자다운 사람이 집례한 의식도 성령의 침례를 대신할 수 없다. 하나님의 영이 마음에 역사해야 한다. 거듭나게 하는 능력을 경험하지 않은 모든 사람은 알곡 가운데 있는 쭉정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손에 키를 들고 타작 마당을 철저하게 정하게 하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장차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말 3:18)분별하실 이다.

그리스도의 은 하나님께로서 난 모든 사람들 안에서 드러날 것이다. 투쟁과 싸움은 성령으로 지배받는 자들 사이에서는 생길 수 없다. “여호와의기구를 메는 자여 스스로 정결케 할지어다”(사 52:11). 교회는 목사가 견지하는 표준보다 높이 올라가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는 회개한 목사와 회개한 백성이 필요하다. 마치 그들이 회계해야 할 자인 것처럼 영혼들을 돌보는 목사들은 양떼들을 평강과 거룩함의 길로 이끌어 갈 것이다. 이 사업에서의 그들의 성공은, 그들이 은혜와 진리를 아는 지식 가운데서 자라나는 성장에 비례될 이다. 교사들의 영혼과 육체와 정신이 거룩해 그들은 그와 같은 성화의 중요성을 백성들에게 감명 깊이 새겨 있다.

무심한 방법으로 신앙적 문제들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진정한 심령의 갈급성과 산 믿음 없이 영적 축복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별로 효력이 없다. 그리스도의 주변으로 가까이 밀려간 방황하는 군중은 그 접촉에서 생명의 능력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불쌍하고 고통받는 여인이 큰 필요를 느끼고 손을 뻗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그는 치료의 능력을 느꼈다. 그의 접촉은 믿음의 접촉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접촉을 아시고, 마지막 때까지 그분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교훈을 거기서 주시고자 작정하셨다. 그분께서는 능력이 당신에게서 나간 줄 아시고 무리를 돌아보시면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그런 질문에 놀라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라고 대답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한 여자를 주목하셨다. 그 여자에게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에게는 큰 기쁨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주제넘은 일을 했던가? 그에게 이루어진 것을 알고 그는 떨면서 나아서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다 말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책망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부드럽게,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 5:30, 31, 34)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무관심한 접촉과 믿음의 접촉이 구별되었다. 하나님을 믿는 산 믿음의 활용이 없는 기도와 설교는 허지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접촉은 우리에게 하늘의 능력과 지혜의 보고를 열어 준다. 그리하여 진흙으로 된 기구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은혜의 이적들을 이루신다.

이러한 살아 있는 믿음이 오늘날 우리에게 크게 필요하다. 우리는 예수님이 진실로 우리의 소유임을 알아야 하고. 그분의 영이 우리의 마음을 정결케 하고 세련되게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의 종들이 온유와 사랑과 함께 진정한 믿음을 가진다면, 그들이 어떤 사업을 이루겠는가! 어떤 열매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나타나겠는가!

나의 형제들이여, 그대들의 육신적 방심에서 그대들을 깨우기 위하여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대들의 위험을 보았다. 교회안에는 신자들과 불신자들이 공존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비유에서 이 두 계급을 나타내신다. 그분은 당신을 따르는 자들을 권면하신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4, 5).

가장(假裝)된 연합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이룬 진정한 연결과는 크게 다르다. 진리를 믿는다는 공언은 사람들을 교회에 속하게 한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이 산 포도나무와 생명적 연결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지는 않는다. 참 제자와, 그리스도를 따르노라고 주장하면서도 그분을 믿는 믿음이 없는 자들을 구별하는 하나님의 척도가 주어져 있다. 한 무리는 열매를 맺고 있지만 다른 무리는 열매가 없다. 한 쪽은 더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하나님의 칼에 자주 전정을 당하지만 다른 쪽은 마른 가지들로서 머지않아 산 포도나무에서 잘려 나가게 되어 있다.

나는 우리 백성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산 증언을 간직하고 교회가 불신의 요소들로부터 순결하게 보존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요 15:4)라고 한 말씀에서 밝혀진 것보다 그리스도에 대한 더 밀접하고 더 친밀한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는가? 가지의 섬유질은 포도나무의 섬유질과 거의 동일하다. 줄기에서 가지로 전달되는 생명의 교류와 힘과 결실은 방해받지 않고 계속적이다. 뿌리는 가지를 통하여 그 영양분을 보낸다. 그와 같은 것이 그리스도에 대한 참 신자의 관계이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서 그분에게서 영양분을 흡수한다.

이 영적 관계는 개인적 믿음을 활용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이 믿음은 우리 편에서 최고의 우선권, 완전한 의존, 완전한 헌신을 나타내어야 한다. 우리의 의지는 완전히 하나님의 의지에 굴복되고, 우리의 감정과 욕망과 흥미와 명예는 그리스도의 왕국의 번영과 그분의 사업의 영광과 동일시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끊임없이 은혜를 받고, 그분께서는 우리에게서 감사를 받으셔야 한다.

이와 같은 연결과 교통의 친밀함이 이루어질 때,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께 놓여지고, 그분의 의는 우리에게 입혀지게 된다. 그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죄로 삼으신 바 되셨다.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있게 되었다. 우리는 사랑하는 아들 안에서 영접을 받는다. 누구든지 말이나 행동으로 믿는 자를 해치는 자는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을 해하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한 사람의 제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리스도께 드린 것으로 인정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에 대한 당신의 관계를 나타내는 아름다운 상징을 주신 것은 그분께서 바야흐로 제자들을 떠나가고자 하신 때였다. 그분은 볼 수 있는 당신의 임재가 없어진 후에 그들이 영적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그분 자신과의 밀접한 연합을 그들 앞에 제시하고 계셨다. 그것을 그들의 마음에 새겨 주기 위하여 그분께서는 그 가장 두드러지고 적합한 상징으로서 포도나무를 그들에게 제시하셨다.

유대인들은 언제나 포도나무를 식물들 중 가장 고상한 것으로, 또한 강하고, 탁월하고, 결실이 풍부한 모든 것의 한 상징으로 간주했다.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대들이 그처럼 높이 평가하는 포도나무는 하나의 상징이다. 나는 실체이다.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 한 민족으로서 그대들은 포도나무를 높이 평가한다. 그대들은 죄인들로서 나를 세상의 모든 것보다 높이 평가해야 한다.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분리되면 살 수 없다. 그대들도 내 안에 거하지 않으면 더 이상 살 수 없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자들은 그분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처럼 이 교훈에 깊은 흥미를 가지고 있다. 사람은 반역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켰다. 그 분리는 넓고 무섭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다시 그분 자신과 연결시켜 주기 위하여 대비책을 마련하셨다. 악의 세력은 인간의 본성과 너무도 동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으면 아무도 승리할 수 없다. 이 연합을 통하여 우리는 도덕적 영적 힘을 얻는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의 정신을 소유하게 되면 의의 열매, 사람들에게 영광과 축복이 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아버지는 포도를 손질하는 분이시다. 그분은 능숙하게 자비롭게 열매맺는 모든 가지를 전정하신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고난과 비난에 동참하는 자들이 이후에는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분은 그들을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히 2:11)신다. 그분의 천사들이 그들을 섬긴다. 그분의 두번째 나타나심도 인자로서 나타나실 것이다. 그리하여 그분의 영광 중에서까지도 그분은 당신 자신을 인간과 동일시하실 것이다. 그분과 연합한 자들에게 그분께서는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사 49:15, 16)라고 언명하신다.

아, 얼마나 놀라운 특권이 우리 앞에 제시되어 있는가!

우리는 이런 축복을 얻는 유일한 통로가 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기 위하여 가장 열렬한 노력을 할 것인가? 우리는 의에 의하여 우리의 죄를, 주님께로 돌아옴으로 우리의 범죄를 깨뜨려 버릴 것인가? 회의론과 불신이 널리 보급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라고 질문하셨다. 우리는 적극적인 산 믿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믿음의 항구성(恒久性)은 우리의 연합의 조건이다.

산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이룬 연합은 지속적이다. 모든 다른 연합은 파멸되고야 말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무한한 값을 지불하셨다. 그러므로 참된 신자는 그리스도를 모든 것 가운데 첫째요 마지막이요 최선의 것으로 택한다. 그러나 이 연합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치르게 한다. 그것은 교만한 자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할 철저한 의존의 연합이다. 이 연합을 이루는 모든 자들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의 필요를 느껴야 한다. 그들은 마음의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에 굴복시켜야 한다. 외적 장애와 내적 장애로 더불어 싸우는 투쟁이 있을 것이다. 애착의 과업은 물론이요 괴로운 분리의 과업도 있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려면 교만, 이기심, 허영, 세속적인 것-모든 형태의 죄-을 이겨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생애는 그처럼 통탄스럽게도 어렵다고 생각하고, 그들이 그처럼 변덕스럽고, 그처럼 가변적인 이유는 간직된 우상들로부터 먼저 그들 자신을 분리시키지 않고 그들 스스로를 그리스도께 결합시키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루어진 후에는 오직 열렬한 기도와 불굴의 노력을 통해서만 그것이 유지될 있다. 우리는 자아를 저항하고, 자아를 부인하고, 자아를 정복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용기와 믿음과 경계로써 우리는 승리를 얻을 수 있다.” (5증언, 226-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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